우리나라의 기업들이 외국과의 계약을 체결할 때 상대방이 만들어오는 계약서에 가격, 지불일자, 납품일자, 제품 사양 등만 확인하고 서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계약서가 표준계약서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 표준약관에 그대로 서명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외국과의 거래에서도 으레 그렇게 하는 것인가보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갑'일 경우에 뿐만 아니라 우리 쪽이 우월한 지위에 있을 때에도 우리가 계약서를 만들어서 제시한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국제거래에서 표준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업종에는 협회에서 추천하는 계약서가 있지만, 그것도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선주협회'에서 추천하는 계약서는 조선소의 입장에서는 수정할 것이 많은 계약서입니다. 건물 임대인 쪽에 유리하게 작성된 임대 계약서가 있고, 세입자에게 유리하게 작성되는 계약서가 있습니다. 계약서의 내용을 어떻게 작성하느냐는 첫째, 거래에서 당사자들의 위치와 둘째, 협상 당사자의 지식과 협상력에 의해 많이 좌우됩니다.





건물임대계약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호경기에 코엑스 몰에 가게를 내려고 하는 사람은 몰에서 정한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계약서는 몰에서 '우리가 쓰는 표준 계약서입니다'하고 내미는 서류에 서명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편으로 작은 건물을 신축하고 1층에 은행 지점을 유치하려고 하는 건물 주인은 은행 측에서 '우리 은행이 지점 계약을 할 때 쓰는 표준계약서입니다'라며 내미는 서류에 서명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은행이 지점을 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임대계약서도 한 종류 만 있는것은 아닙니다. 앞에 예를 든 코엑스 몰에 지점을 내려고 하는 은행은 몰에서 준비한 계약서에 서명하겠습니까, 아니면 자기들이 준비한 계약서를 내밀며 몰 측의 서명을 요구하겠습니까?



우리 쪽이 우월한 지위에서 진행하는 계약이라도 협상을 진행하는 당사자가 상대방이 내미는 계약서를 선택의 여지가 없는 표준이라고 믿는다면 자신의 유리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조건의 계약을 체결할 수 있습니다. 협회나 업계에서 정한 계약서에도 수많은 변종이 있을 수 있고, 인쇄되어 있는 문구도 당사자의 협상에 의해서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구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고, 어떤 함정이 있을 수 있으며, 내게 유리하도록 작성하려면 어떤 조건을 달거나 어떤 수정을 행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자기 편에 유리하도록 계약서를 작성할 수 없습니다. 유리한 계약서, 아니 적어도 일방적으로 불리하지는 않은 계약서를 작성하려면 해당 비즈니스와 관련된 법률에 대한 지식을 갖고, 그 법률에 바탕해서 만들어진 계약서의 각 문구가 갖는 의미와 변형된 모습들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 법률가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업가들은 세세한 부분까지 협상을 마무리해놓고 난 후 문안작성 단계에서 변호사를 참여시킵니다. 어떤 경우에는 문안 작성도 마무리해놓고, 아니면 상대방이 작성해 온 계약서를 받아 들고서 변호사를 찾습니다. 그리고는 거래를 성사시키고 싶은 조급함에 '큰 문제가 없는지만 봐 주세요'라고 요구합니다. 이때 '큰 문제'가 뭔지는 본인도 모릅니다. 다만 세부사항을 자세히 검토하느라고 변호사비를 많이 청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일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어 속담을 인용하자면 '악마는 세부사항에 들어있습니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 큰 문제는 없지만 우리에게 불리한 계약과 큰 문제는 없지만 우리에게 유리한 계약이 있는 것입니다. 계약서의 세부 사항을 유리하게 고치다가 계약이 깨어질까봐 겁을 내면 불리한 계약에 서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법률가의 시각에서 보자면 가장 바람직한 국제계약은 협상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변호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인간관계를 맺는다거나, 거래를 하기로 한다는 정도의 큰 원칙만 기업가가 합의해두고 각종 대금의 지불방식, 물품의 인도 조건 등 세부사항은 변호사와 실무자에게 맡겨두는 것이 유리한 계약을 체결하는 비결입니다. 기업인들은 변호사가 법을 알겠지만 비즈니스의 실무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변호사들은 해당 산업분야의 거래와 관련된 각종 조건 및 일어날 수 있는 분쟁을 예전의 사례를 바탕으로 잘 정리해 놓은 법률서적들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모델 계약서와 각 계약서의 조항들의 의미와 대안들에 대해 설명해 놓은 자료들을 통해 변호사는 사업을 하는 방법은 몰라도 그 사업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은 기업가보다 더 많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지식으로 무장한 변호사들은 계약서의 구체적인 내용을 결정하는 협상에서 기업인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